아코디언이라는 악기를 떠올릴 때 어떤 생각이 먼저 들까요? 이 앨범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아코디언은 뽕짝에나 사용하는 그저 경박스러운 악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앨범으로 인해 아코디언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2009년 10월 15일에 발매된 이 앨범은 2021년 12월 4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작고한 아코디언 연주자 故심성락 선생의 데뷔앨범입니다. 2009년 발매 당시 73세로 우리나라 최고령 데뷔 앨범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트랙 순서
1. My Mother Mermaid / 영화 인어공주 中
2. La Dolce Vita / 드라마 달콤한 인생 中
3. Elegy For Us
4. Libertango / Feat. Richard Galliano
5. One Fine Spring Day / 영화 봄날은 간다 中
6. 자전거 / 영화 효자동 이발사 中
7. 꽃밭에서 / Feat. Richard Galliano
8. Love Affair Theme / 영화 Love Affair 中
9. 매화가 흐트러진 날
10. 바람이 운다
11. 나는 순수한가
12. 재회
바람 같이 지나간 세월
아코디언은 오른손은 건반을 연주하지만 왼손으로 주름진 공기주머니인 "벨로우즈"에 끊임없이 바람을 불어넣어야 소리가 나는 악기입니다. 벨로우즈에 바람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이 되는 아코디언의 소리. 이 앨범은 그런 바람 같았던 선생의 인생을 담고 있는 앨범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명은 심임섭으로 1936년 태어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후 귀국하여 6.25를 겪은 후 경남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한 악기점에서 아코디언을 처음 만나 전문적으로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독학으로만 익혔다고 합니다. 원래는 클래식 연주자가 꿈이었으나 8살 때 잘린 손가락 때문에 클래식 연주자의 꿈은 접고 당시 악기점 사장의 추천으로 부산 KBS의 노래자랑 프로그램에서 반주자로 발탁되고 이후 군 예대에서 악장을 맡으면서 독보와 편곡에 관한 기본기를 익히게 됩니다.
1965년 그는 오르간과 아코디언 전문 연주자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 했지만 노래하는 듯한 그의 연주는 60년 동안 한국대중음악사에 많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당시 지구레코드 사장의 권유로 서울로 진출해 세션맨으로 활약했고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故배호에게 곡을 주는 작곡가로도 활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1966년부터 78년까지 전자오르간 경음악 앨범을 다수 발매하는데 붐이 일어날 정도로 많은 판매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특히 1969년에는 故이봉조 선생과 함께 "경음악의 왕"이라는 앨범을 발매하는데 당시 경음악 레코드 판매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1974년부터 그는 대통령실의 공식 악사로 활동하게 되는데 이는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을 거쳐 1992년 故김영삼 정부 초기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故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애창곡이었던 고복수의 '짝사랑'을 연주하고 녹음을 했던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故배호, 남일해, 남진, 나훈아, 심수봉, 주현미, 송대관, 조덕배, 최백호, 신승훈, 김건모, 이승철, 장윤정 등 한 시대를 품미했던 많은 가수들과 함께 작업하며 선명한 발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가수들 이름 한 번 불러봐. 안 한 사람이 거의 없다니까... 허허허" 하고 해맑게 얘기할 정도로 많은 가수들과 작업을 합니다.
바람 같이 지나간 세월을 압축한 앨범
이 앨범은 선생의 인생을 압축한 앨범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앨범을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아코디언이 가진 악기의 매력을 최대한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심성락 선생의 깊이 있는 연주가 그 매력을 한껏 돋보이게 해주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 앨범을 만드는데 무려 4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앨범의 완성도를 위해 선생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노력의 결과가 여기에 묻어있습니다.
첫 트랙부터 익숙한 사운드가 나오는데 전도연, 이병헌 주연의 영화 [인어공주]에서 OST로 쓰인 'My mother mermaid'는 이 앨범의 타이틀 격이라 할 수 있는데 선생의 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이기도 합니다. 이 앨범에서는 다수의 영화에서 쓰인 선생의 OST가 두 곡 더 수록되었는데 다섯 번째 트랙인 'One Fine Spring Day'는 유지태, 이영애 주연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쓰였고 다음 트랙인 '자전거'는 송강호 주연의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 쓰였습니다.
2008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이동욱, 오연수 주연의 드라마 [달콤한 인생] OST에 수록된 연주곡 'La Dolce Vita'는 강렬한 사운드가 제가 드라마를 시청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드라마인지 연주만 들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1994년 제작된 영화 미국 멜로영화 [Love Affair]는 엔리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가 작곡한 동명의 테마곡이 여덟 번째 트랙에 수록되었는데 피아노 연주로만 듣다가 기타와 어우러진 아코디언 연주는 영화가 전해 준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최고의 아코디언 연주자로 알려진 리차드 갈리아노(Richard Galliano)에게도 선생은 극찬을 받았는데 이 앨범에서 두 곡을 함께 했습니다. 네 번째 트랙인 'Libertango'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강렬한 탱고 사운드가 온몸에 전율을 일게 합니다. 익히 알려진 故이봉조 선생이 작곡하고 정훈희가 불렀던 '꽃밭에서'는 원곡과는 다르게 아코디언 사운드로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내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네 곡은 세 명의 작곡가(신명수, 조성우, 황상준)가 참여한 새로운 곡인데 사극의 한 장면이 저절로 떠올려지는 '매화가 흐드러진 날', 탱고풍의 곡 '바람이 운다', 바이올린 연주와 어우러진 '나는 순수한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벌써 끝인가 싶을 정도로 진한 여운을 남겨주는 '재회'까지 아코디언 연주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람의 연주로 기억되길
故심성락 선생은 어린 나이에 손가락 마디를 읽었고 한평생 동안 난청을 앓았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손가락과 귀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음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데 선생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대통령의 악사" 였으며 작곡가로서 역량도 아낌없이 발휘하였고 "최고의 세션맨"이라는 칭호를 얻어 그가 가지고 있는 장애는 마치 별 거 아니라는 듯 수많은 명곡과 많은 울림을 주는 연주를 남겼습니다.
서두에 언급하였지만 저는 아코디언을 뽕짝에나 쓰는 경박한 악기로 생각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소위 말하는 "뽕끼"는 전혀 없고 아코디언이 이렇게 다채롭고 매력적인 악기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아코디언 연주에 바친 선생의 연주는 이제 볼 수 없지만 60년 넘게 아코디언 연주자로서의 그가 남긴 발자취는 벨로우즈에 넣는 바람처럼 빠르게 지나갔지만 그 바람의 연주는 계속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한줄평 : 아코디언이 가진 매력을 느끼고 싶다면 이 앨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심성락 - My Mother Meramaid (2020년 1월 4일 놀면뭐하니 中)
https://www.youtube.com/watch?v=vFdIJJxgHaQ
※ 이 블로그의 모든 사진은 직접 구매한 앨범을 촬영 혹은 스캔하였으며 리뷰 역시 직접 듣고 작성했습니다.